우리가 다시 사랑할 확률

유난히 바쁜 오후였다. 점심 먹기 전까지는 설렁설렁 옆자리 여시 씨와 농담을 할 정도로 한가로웠는데, 급하게 결재를 올려야 하는 기획안 때문에 사무실 사람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여시 씨가 작성한 기획안 초본을 수정했다. 여주야, 정식으로 소개시켜 주고 싶은 사람 있는데 오늘 시간 괜찮아? 유태오가 보낸 메신저도 한참 뒤에야 확인...

새벽녘의 색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쯤에야 잠든 금요일. 처음 들어와 보는 내 집이 신기한 건지 이방 저방을 뛰어다니는 밤톨의 소리에, 유태오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유태오는 참 대단도 해. 분명 나랑 같이 잠들어놓고 언제 또 일어나서 저렇게 밤톨이랑 놀아주고 있는 건지.

똑똑- 경쾌한 소리가 귀를 울렸다. 다름 아닌 내가 유태오가 있는 팀장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 눈썹을 들썩이며 막 제 방을 들어오는 사람을 살피던 유태오가 내 얼굴을 확인하자 눈꼬리마저 휘어질 정도로 미소를 지었다.

금요일, 퇴근을 두 시간 정도 남긴 시간. 점심시간에 잠시 외출해서 받아온 선물 상자를 빤히 쳐다보며 지긋이 웃고 있는데, 송 부장이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내 자리로 다가왔다. 예감이 썩 좋진 않았고,

7년 전 여느 때처럼 유태오와 나란히 누웠다. 단단한 어깨에 머리를 대고 유태오의 가슴팍에 손을 얹자 유태오가 머리를 감싸 끌어안았다. 제주도에서 잠결에 그런 적이 있었는데, 유태오는 몰랐으니 따지고 보면 정말 오랜만인 모습이었다. 제주도에서처럼 눈치 보지 않고 유태오의 몸에 얼굴을 더 파묻으며 웅얼댔다.

유태오가 뻔히 나를 따라오는 걸 다 알면서도 모른 척 끝끝내 문을 닫았다. 이렇게 후덜거리는 다리로 어떻게 계단을 타고 내려온 건지, 겨우 지탱하던 다리는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보기 좋게 풀려버렸다. 그렇게 현관문에 기댄 채로 그 자리에 스르륵 주저앉았다.

집에 도착한 지 한참이나 지났지만, 집안 어디에도 불이 켜진 곳은 없었다.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았다. 낮에 본 유태오와 여자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하면 할수록 더 진하게 재생될 뿐이었다. 퇴근 시간까지 무슨 생각으로 일을 했는지, 무슨 정신으로 집까지 운전해서 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출근하자마자 사직서 양식을 뽑았다. 왼손으로 삐뚤삐뚤한 글씨로 쓰면 혹 우스워 보이기라도 할까, 유태오에게 그렇게 보이기는 죽어도 싫어 깁스에 감겨있던 붕대까지 풀어 한 자 한 자 천천히 써 내려갔다. 근 6년을 일한 회사 생활이 달랑 이 종이 하나에 끝이 난다는 게 허무했다. 절대 결재 칸에 사인해주지 않겠다는 차장님, 부장님을 설득하는데 한참이나 걸렸다...